2024. 12. 17. 10:50ㆍ카르마의 영혼
<그리스 노예 신디카>
예수께서는 베다니아의
집 안에 있는 회랑이 있는
마당에 앉아 계신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아침
제자들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내가 본 그 마당이다.
집주인들과 사도들과
제자 요한과 티몬 그 밖에
요셉과 니고데모,
그리고 경건한 여자들에게
둘러싸이셔서
집의 벽에 기대고 방석을 깐
대리석 의자에 앉으셔서,
당신 앞에 서서 당신이 하신
어떤 질문에 대답하는 것 같은
신디카의 말을 들으신다.
모두 관심을 혹은 더,
혹은 덜 가지고 여러 가지
자세로 듣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의자에 앉아 있고,
어떤 사람은 땅바닥에 앉아 있고,
더러는 서 있고, 더러는 기둥이나
벽에 기대어 서 있다.
“그것은 제 처지에서 온 중압을
느끼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조국에서 추방된
외톨이이고 노예라는 것을
믿지 않는 것,
믿기를 거부하는 것이었고,
어머니와 오빠를,
아버지와 아주 상냥하고 다정한
이스멘을 영원히 잃은 것이 아니란
생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잃은 것이 아니라 로마가
자유인이었던 우리를 마소처럼
갈라놓고 팔아먹은 것과 같이
온 세상이 우리를 갈라놓으려
열중한다더라도,
이 세상 저 너머에
우리가 모일 장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물질,
즉 사람들을 묶는 물질뿐이 아니고,
그 안에는 도덕적 무질서와
호식(好食) 속에서 살겠다는
의지가 아니면,
아무 속박도 사로잡을 수 없는
자유로운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도덕적 무질서와 호식을
여러분은 ‘죄’라고 부릅니다.
제 노예 생활인 밤의 어두움
속에서 저의 빛이 되었던 사람들은
이것을 다르게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들도 육체적이고
나쁜 열정으로 인해
육체에 못이 박힌 영혼은 여러분이
하느님 나라라고 부르는 것에는
이르지 못함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데스(Hades) 안에서의
(그리스 신화의 지옥의 신)
신들과의 공동생활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행복한 불멸을 차지하고
우리가 사랑한 사람들과
결합하기 위해선,
덕행의 유산을 자기에게 주면서
물질주의적 경향에 빠지는 것을
피하고, 육체의 자유에 도달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산 사람들의
영혼을 도와주러 옮을 막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생각하고,
따라서 자기 곁에 어머니의
영혼이 와 있는 것을 느끼고.
어머니의 영혼이
딸의 영혼에게 말할 때,
어머니의 눈길과 목소리를
다시 찾아내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예, 어머니, 어머니에게로 가기
위해서 그렇게 하겠어요.
어머니의 눈길을 어지럽게
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하겠어요.
어머니의 목소리가 눈물에
젖지 않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하겠어요.
어머니가 평안하게 있는 하데스를
슬픔에 잠기게 하지 않기 위해
그렇게 하겠어요.
이 모든 것을 위해서 제 영혼을
자유롭게 보존하겠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아무도
제게서 빼앗아 갈 수 없는
유일한 것,
제 이성을 덕행에 굴복시킬 수
있도록 깨끗하게 보존하기를 원하는
유일한 것을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유요
기쁨이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려 했습니다.
생각은 이렇게 하고 나서
생각과 일치하지 않게
행동하는 것은
일부분이 잘린 거짓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유배지(流配地)에서도
조국을 재건해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나 안에 그의 제단과 믿음과
종교와 애정을 담은
내적인 조국을…
위대하고 신비로운
조국을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안개 핀
어느 날 아침 넓은 바다
가운데에 있는 뱃사람이
해안이 어떤지를 아는 것과 같이,
알기는 하지만 내세를 모르진
않는다고 생각하는
영혼의 저 신비 안에서는,
그렇게 위대하고 신비스럽지는
못한 조국입니다.
뱃사람처럼 안다는 것은 겨우 어떤
점만이 분명히 나타나는 밑그림같이
희미하게 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폭풍우로 인해 괴로움을
당한 피로한 항해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럼요! 충분히,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저기 항구가 보인다,
이제는 평안하게 됐다’ 하고요.
영혼들의 고향, 영혼들이 떠나온
그곳… 생명의 장소 말입니다.
생명은 죽음에서 생겨나니까요…
오! 저는 선생님 말씀 중의 하나를
알기 전까지는 이것을 반쯤밖에
이해하지 못했었습니다.
그 뒤에는… 그 뒤에는,
그것이 마치 단단한 제 생각을
쬐는, 햇살과도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환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리스의 선생들이
어디까지 도달했는지,
그러다가 그들이 어떻게 길을
잃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한 소여(所與)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의 정리(定理)를 정확하게
풀기 위한 유일한 소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소여란,
주님 이시오, 존재하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참 하느님이십니다!
제 이교도의 입술로 그분의
이름을 말할 수 있습니까?
예, 저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분에게서 왔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모든 사람의 정신에
그럴 능력을 넣어 주셨고,
또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에게는
뛰어난 지능을 넣어 주셔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능력으로
정말로 신인(?人)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저 진리들을
쓰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진리들은 벌써 종교인데
선생님의 것과 같은 하느님의
종교는 아니지만
적어도 윤리적인 종교이기는 하고,
영혼들을 여기 이 세상에
머무르는 동안뿐 아니라,
영원히 ‘산채로’
보존할 수 있는 종교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죽음을 통하여 생명이 태어난다’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들었습니다.
그 말을 한 사람은 완전히
취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지능이 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숭고한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주님, 제 교만을 용서하십시오.
저는 그 사람보다 더 잘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저는
그것이 기쁩니다.”
“무엇을 이해했단 말인가?”
“이 세상의 생명은
생명의 시초의 근원에 지나지 않고,
참 생명은 죽음이 우리를
낳아 줄 때 …
이교도로서 말씀드리면 하데스에,
선생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말씀드리면
영원한 생명에 낳아 줄 때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잘못 말했습니까?”
“제대로 말했소” 하고
예수께서 인정하신다.
니고데모가 이야기를
가로막는다.
“그러나 당신은 어떻게
선생님의 말씀을 알게 되었소?”
“배고픈 사람은 음식을 찾습니다.
저는 제 음식을 찾습니다.
제 교양과 아름다운 목소리와
발음 덕택으로 낭독자가 되어서
제 주인들의 서재에서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 만족하지
못했었습니다.
저는 인간 학문이 장식된
벽 너머에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금으로 된 감옥에 갇힌 사람같이
나가서 발견하려고 벽을 두드리고
문을 밀고 나가려고 했습니다.
…제가 마지막 주인과 같이
팔레스티나로 왔을 때
저는 암흑 속으로
떨어지지 않나 하고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반대로
빛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가이사리아 하인들의 말은 벽을
잘게 부수는 곡괭이질과 같아서
갈라진 틈을 점점 더 크게 했고,
그리로 해서 선생님의 말씀이
뚫고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말씀과
그 지식을 거두어서,
마치 어린아이가 구슬을 꿰듯
줄지어 놓아 그것으로 장식을
만들어 가지고,
진리를 받기 위해 점점 더
깨끗해지도록 거기에서 힘을
얻어냈습니다.
저를 깨끗하게 함으로써
발견하리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말입니다.
저는 진리와 지혜와 신성(神性)과
만나기 위해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깨끗하게 되고자 했습니다.
주님, 저는 터무니없는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저분들이 놀라서 저를
바라다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제게 말을
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말하시오, 말해요.
그것은 필요하오.”
“저는 힘과 절제로 외부에서
오는 압력에 저항했습니다.
저는 세상의 기준으로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지혜를
쾌락과 맞바꾸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지혜가 없으면,
다른 덕행들을 가지는 것이
아무 소용도 없으니까요.
철인이 이 말을 했습니다.
‘정의와 절제와 힘도 지혜를
동반하지 않으면
그림으로 그린 무대장치와 같고,
견실한 것과 실제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는, 진짜 노예의
덕행이다’ 하고 말입니다.
저는 실제적인 것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제 주인이 어리석게도 제 앞에서
선생님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러자 벽이,
휘장이 되는 것과 같았습니다.
휘장을 찢고,
진리와 결합하기 위해선
원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했습니다.”
출처: 마리아 발또르따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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