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격적인 성품

2022. 12. 29. 06:58카르마의 영혼

 

<공격적인 성품>

 

 

날씨는

비가 올 것 같다.

 

베드로는 돌아온

아이네아스 같이 보인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인물,

피난 갈 때 아버지를 업고 갔다

해서 야베를 업고 가는 베드로를

아이네아스와 비교한 것)

 

아버지를 업고 가는 대신

베드로 겉옷으로 푹 둘러싼

어린 야베를 어깨에 올려놓고 있다.

 

야베의 작은 머리가 베드로의

반백의 머리 위에 나타난다.

 

베드로의 목에는 어린아이의

팔이 감겨 있는데,

 

베드로는 습지를 철벅거리면서

걸어가며 웃고 있다.

 

 

“이런 꼴은 면할 수도 있었는데.”

하고, 유다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과, 땅에서 튀는 물이 옷에

묻자 신경질을 내며 투덜거린다.

 

“그야! 우리가 면할 수

있는 것이 많기도 하지요!” 하고

 

엔도르의 요한이

하나밖에 없는 눈으로

 

모양 꾼 유다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한다.

 

그 외눈이 두 눈만큼이나

잘 보는 것 같다.

 

 

“그건 무슨 뜻이오?”

 

“우리가 사람에 대해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서 자연의 힘을 보고

 

우리에게 경의를 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익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비 몇 방울이나

물 몇 방울 튀는 것보다

 

훨씬 더 중대한 문제에도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그건 맞는 말이오.

하지만 나는 옷을 제대로 입고

 

깨끗한 차림으로 시내에

들어가는 걸 좋아해요.

 

 

나는 친구들이 많은데,

그것도 높은 자리에 있는

친구들이란 말이오.”

 

“그러면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날 놀리는 거요?’

 

“아닙니다!

그렇지만 나도 옛날엔 선생이었고,

또한 옛날의 학생이었습니다.

 

난 살기 시작한 때부터 배웠습니다.

우선 근근이 생활하는 법을 배웠죠.

 

그리고는 인상을 관찰했고,

인생의 쓴맛도 맛보았고,

쓸데없는 정의도 행동했어요.

 

쓸데없는 정의란,

하느님과 사회에 대항해서

 

‘혼자’만 있는 사람의

정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선 나를 가책으로 벌하시고,

사회는 억압과 압박으로 벌했습니다.

 

따라서 정의에 얻어맞은 것은

결국 나였지요.

 

마침내 이제는 ‘사는 것’을 배웠고,

지금도 배우고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선생이고

학생인 만큼 학과를 복습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아시겠지요.”

 

“하지만 나는 사도요 ….”

 

“그리고 나는

보잘것없는 사람이고요.

 

 

나도 그것은 압니다.

그러니까 당신에게 감히 교훈

할 생각을 해선 안 되겠지요.

 

그러나 아시겠어요?

사람이 어떻게 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키프로스에서 성실하고,

존경받는 교육자로 죽을 거라,

생각했는데,

 

살인자가 되고 도형수가 되었어요.

그러나 내가 복수하려고

칼을 쳐들었을 때,

 

그리고 쇠사슬을 끌고 다니며

세상을 미워할 때,

 

누가 와서 내가 성인의 제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면,

 

그 말을 한 사람의

이성을 의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 이렇게,

그러니 사도인 당신에게도

 

내가 좋은 충고가 될 수 있을지

누가 알겠어요?

 

내가 거룩해서가 아니라,

경험이 있어서 그런 거지요.

 

내게 성덕이 있다고는

생각조차 안 합니다.”

 

“그 로마인이 당신을

디오게네스라고 부른 것은

제대로 부른 거요.”

 

“물론이지요.

그러나 디오게네스는

 

인간을 찾았지만,

인간을 분별하진 못했습니다.

 

 

나는 그보다 더 행복해서,

여자가 있다고 믿은 곳에서

뱀을 만났고, 얻었고

 

친구로 생각했던 사람이

아내와 간통한

남자였음을 알아냈어요.

 

그러나 이 앎으로 인해 그렇게

미쳐서 여러 해 동안 헤매다가

나는 사람을, 성인을 찾아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지혜가

아닌 다른 지혜는 알지 못하오.”

 

“그렇다면 당신은 벌써 구원받을

만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지식도

가지고 있어요.

 

 

아니 그보다도 하느님의

지혜를 가지고 있어요.”

 

“그건 같은 거지요.”

 

“천만에요!

그것은 해가 쨍쨍한 날과

안개 낀 날과 같은 것입니다.”

 

“결국 당신이 내게 교훈을

하는 거요? 나는 그건 싫소.”

 

“내 말을 막지 말아 주세요!

처음에 나는 아이들에게

말을 했어요.

 

아이들은 정신이 딴 데

팔려있었습니다.

 

그다음엔 그림자 보고 말을 했지요.

그랬더니 그림자가 나를 저주했어요.

 

 

그다음에는 닭들에게 말을 했더니,

이놈들은 아이들과

그림자보다 나았어요.

 

이제는 아직 하느님과

말할 수가 없기에 나 자신과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것을 못하게 막으려 합니까?

나는 눈이 하나밖에 없고,

 

내 인생은 아양으로

인해 부서졌고,

 

여러 해 전부터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내 생각만이라도

보람 없는 것이 되지 않게

허락해 주시오.”

 

 

“예수는 하느님 이시오.”

 

“나도 압니다. 그리고 믿습니다.

당신보다 더 믿어요.

 

나는 선생님의 덕택으로

다시 살아났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선이시지만

언제나 선생님, 즉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나처럼 보잘것없는

사람은 당신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선생님께 감히 예의 없이

굴지 못합니다.

 

내 영혼은 선생님께 말합니다.

그러나 입술은 감히 말을 못 해요.

 

 

나의 영혼은,

선생님께서 내 영혼이

감사와 뉘우치는

 

사랑의 눈물을 흘리는 중에 있음을

느끼신다고 생각합니다.”

 

“요한아, 사실이다.

나는 너 영혼을 느낀다.”

 

예수께서 이야기하는 데 끼어드신다.

유다는 창피해서 얼굴을 붉히고

 

엔도르의 요한은 기뻐서

얼굴이 빨개진다.

 

“내가 네 영혼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네 영이

하는 일도 느낀다.

 

말 잘했다.

네가 내게 교육을 받으면

 

선생과

정신 차린 학생이었던 것이

네게 도움이 될 것이다.

 

말해라,

너 자신하고라도 말해라.”

 

“선생님, 얼마 전 어느 날,

자신의 나와 말하는 것은

 

나쁜 일이라고

제게 말씀하셨는데요.”

하고 유다가 무례하게 말한다.

 

 

“사실이다. 그런 말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네가 네 자신의

자아를 비방 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비방을 하지 않는다.

묵상을 하는데, 훌륭한 목적을

가지고 묵상한다.

 

그러니까 나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제가 틀린 것이군요!”

유다는 공격적이다.

 

“아니다. 네 마음속에

비가 와서 그렇다.

 

그러나 날이 항상 맑을 수는 없다.

농부들은 비를 바란다.

 

 

그러니까 비가 오라고

기도하는 것도 사랑이다.

 

비도 사랑이다.

그런데 보아라,

 

아름다운 무지개가 아타로 에서

라마 쪽으로 구부러져서 꽂혀 있고

우리는 벌써 아타로를 지나왔다.

 

을씨년스러운 골짜기를 지나온 것이다.

여기는 모든 것이 잘 가꾸어졌고

 

구름을 치워버리는

햇빛을 받아 아름답다.

 

라마에 가면 예루살렘까지는

36스타드가 남는다.

 

 

기베온 사람들이 소름 끼치는

방탕을 일삼던 곳을 나타내는

그 야산을 지나게 되면

 

우리는 예루살렘을

다시 보게 된다.

 

유다야, 육욕의 해악은

무서운 것이다 ….”

 

유다는 대답하지 않고

화가 나서 물구덩이 속을

철벅거리며 멀어져 간다.

 

“아니 저 사람이

오늘 왜 저럽니까?” 하고

바르톨로메오가 묻는다.

 

“요나의 시몬이 듣지 못하게

입 다물어라. 토론을 피하자.

 

 

그래서 … 시몬의 즐거움을

방해하지 말자. 저 사람은

아이하고 정말 행복하니까!”

 

“그러겠습니다, 선생님.

그렇지만 그건 좋지 않습니다.

그에게 그 말을 하겠습니다.”

 

“그 사람은 젊다. 나타나엘아.

너도 젊은 때가 있었다 ….”

 

“예 … 그렇지만 … 선생님께

불경하게 굴어선 안 됩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인다.

 

베드로가 달려온다.

“무슨 일이야? 누가 불경하게 굴어?

새 제자가?”

 

 

그러며 엔도르의 요한을 바라다본다.

엔도르의 요한은 예수께서 사도를

나무라신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슬그머니 자리를 떠서

알패오의 야고보와 열성 당원

시몬과 말을 하고 있다.

 

“천만에,

그 사람은 소녀처럼 공손해.”

 

“아! 그래!

그렇잖으면 … 엉!

그의 눈이 위험할 거야.

 

그럼…

그럼, 유다로구먼! …”

 

“시몬아, 이거 봐라.

너는 네 아이나 보살피지 못하겠니?

 

 

너는 아이를 나한테서 빼앗아 가고,

그러면서 또 나타나엘과 내가

 

다정스럽게 이야기하는데

끼어들려고 한다.

 

너는 너무 많은 일을 하려고

하는 것 같지 않으냐?”

 

예수께서 하도 태연스럽게

미소 짓고 계시기 때문에

 

베드로는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는 바르톨로메오를

바라본다.

 

그러나 바르톨로메오는

매부리코가 있는 얼굴을 들어

하늘을 쳐다본다.

 

… 베드로는 의심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출처: 마리아 발또르따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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