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시를 마치며

2023. 4. 13. 05:40카르마의 영혼

 

<환시를 마치며>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작은 요한에게 삽화와 말을

명확히 해주고 받아쓰게 한 이유는,

 

희생자인 사랑하는 이 영혼에게

나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전해

주는 것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중심은,

가르치고 싸우는 교회(지상 교회)에

대한 내 사랑과,

 

영혼들의 완덕을 향해 올라가는데

힘을 돕고자 하는 갈망이다.

 

나를 아는 것은

올라가는데, 도움이 된다.

 

내 말은 생명이다.

중요한 이유들을 말하겠다.

 

 

첫째.

 

1947년 1월 18일에 받아 쓰라고

불러 줄 때 내가 말하는

이유 들을,

 

작은 요한은 여기에 전부

써놓아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큰 이유다.

 

그것은 너희들이 지금

멸망할 지경인데,

 

나는 너희들이

구원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선물로 주는

가장 심각한 이유는,

 

내 대리자 비오 10세에 의해

단죄한,

 

현대주의가 타락해서 점점 더

해로운 사상이 생겨나는 이 시대에,

 

 

내 대리자로 대표하는

거룩한 교회가,

 

아래 사실들을 부인하는 자들을

논박하기 위한,

 

더 많은 수단을

가지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들이 부인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 교리의 초자연적 성격과

그리스도의 천주성과,

 

믿음의 역사

(복음서, 사도행전, 사도들 편지, 성전)

우리에게 전해진,

 

실제적이고 완전한 하느님이며,

사람이었던 그리스도의 진실성과,

 

 

* 내가 말로써 가르쳤던

나의 교리와 같은,

 

바울로와 요한과 니체아, 에페소,

칼체돈 공의회의 가르침과,

 

* 하느님의 것이고 완전함이기에

끝없는 내 지식과,

 

* 하나이면서 거룩하고 공정한

사도에게서 내려오는 교회의 교리와,

 

성사의 기원이

하느님께 있다는 것과,

 

* 내가 모든 사람을 위해 준 복음이

보편적이고, 세상 마칠 때까지

계속되리라는 것과,

 

 

* 처음부터 내 교리가

완전함의 성질로써

 

계속적인 변화를 거쳐 지금처럼

형성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주어진 그대로인 것이라는,

 

즉,

그리스도의 교리며,

은총의 시기의 교리며,

하늘나라의 교리며,

 

너희들 안에 있는

하느님 나라의 교리와

 

하느님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기쁜 소식이라는 것과,

 

* 머리가 일곱 달리고

뿔 열 개를 가지고 머리에

일곱 개의 왕관을 쓰고,

 

 

꼬리로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서 아래로 내동댕이친,

(그런데 내 진정으로 말하지만,

그 별들은 땅보다도 훨씬 아래쪽으로

내던져지고 팽개쳐졌다.)

 

여인을 괴롭히는 붉은 용과,

그들 모습과,

 

그들의 경탄할만한 일들에 매혹되어,

너무나 많은 사람이 숭배하는

바다와 땅의 짐승들과,

 

지금까지 덮여있던 영원한 복음서

책장 전부를 활짝 펼쳐 들고서

 

하늘 가운데로 날아다니는

천사와 대립시켜라.

 

이것은 사람들이 그 빛의 덕택으로

그들 어둠 속으로 집어넣으려는

 

 

아가리 일곱 달린 큰 뱀의

나층(螺層 {칠죄종 또아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고,

 

내가 돌아왔을 때,

끝까지 항구 한 사람들 마음속에

 

아직 살아있는 믿음과 사랑을 얻어

만나게 하고,

 

그런 사람들이

사탄과 사람들 일로 인해

 

사랑을 만나게 되는걸

바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게 하기 위함이다.

 

 

둘째.

 

영적인 선생들과 영혼의 지도자에게

그 당시 내 주위에 살았던 여러 가지

정신을 가진 사람들의 세계와,

 

그들 구원을 위해,

내가 사용했던 여러 가지 방식을

연구하게 함으로써

그들 임무를 돕는 것이며,

 

사실, 많은 사람에게

오직 한 가지 방법만 쓰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자발적으로 완덕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의인을

이끌어 가는 방법이 다르고,

 

믿기는 하지만, 죄인인

사람에게 써야 할 방법이 다르고,

이교도에게 써야 할 방법이 다르다.

 

너희들 선생이 이교도라고

판단하는 것처럼,

 

 

너희들이 어떤 사람을

이교도라고 판단하게 된다면,

 

이교도는 너희들 가운데

얼마든지 있다.

 

참 하느님을,

권력과 힘의 우상이나

황금이나 음란이나

 

그들 지식의 교만을

우상으로 바꾸어버린

불쌍한 사람들이 이교도다.

 

또 현대판 개종자들,

즉 그리스도 사상은 받아들이면서도

분리된 교회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나라에 속하길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 써야 할

방법도 다르다.

 

 

아무도 업신여겨서는 안 되고,

그 어느 다른 양들보다

 

이 길 잃은

양들을 업신여겨 선 안된다.

 

그들을 사랑하고

오직 하나인 양의 집으로 다시

데려오도록 힘을 써,

 

목자인 나 예수의

소원이 채워지게 하여라.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로마인들이나

그리스인들과 접촉을 가졌다는

것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부분을

받아들일 수 없다.’

 

 

복음서에 나타나지 않거나

복음사가 그들의 깨뜨릴 수

없는 히브리인 정신 상태 때문에

 

그들이 동의하지 않았던

삽화들에 드리워졌던,

 

두꺼운 침묵의 장막 뒤에

겨우 비치고 보였던

사실 들이 얼마나 많으냐!

 

너희들은 내가 한 일을

다 안다고 생각하느냐?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너희들이 내 공생활에 대한

이 설명을 읽고 받아들인 후에도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만일 내가 작은 요한(발또르따)에게

너희에게 모든 것을 전해 주라며,

그래서 모든 것을 알게 했더라면,

 

내가 임무를 행한 모든 날과,

그날 하루하루에 행한 모든 행동을

기록하게 했었다면,

 

피로로 인하여

그를 죽게 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일을 하셨다.

 

그 하신 일들을 낱낱이 다

기록한다면, 기록된 책은

 

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요한은 말했다.

 

과장법은 별도로 치고라도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하지만,

 

내 개별적인 모든 행동,

내 개별적인 모든 가르침,

 

영혼 하나를 구하기 위한

내 보속과 기도들도 써야 했더라면,

 

 

나에 대한 책을 보관하기 위해선

너희들 도서관 중의 하나에서,

 

가장 큰 도서관 중에 큰 방

여러 개가 필요할 것이다.

 

또 진정으로 말하지만,

나에 대한 일을 별로 잘 알지

못하면서,

 

그래서 언제나 부도덕과 이단으로

거의 더럽혀진 저 인쇄물들을

그렇게 좋아하기보다는,

 

저 많고 많은,

먼지 앉고 불건전한

쓸데없는 지식들은 불에 던져버리고,

 

그 대신 내 책들을 가져다

놓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할 것이다.

 

 

셋째.

 

살과 피로는 진짜 아담의 후손인,

그러나 죄 없는 아담의 후손인

사람의 아들인 나와,

 

마리아 모습의 그 진실성에

대해 알려주려는 것이다.

 

만일 첫째 조상들이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들의 완전한 인간성의 품위를

떨어뜨리지 않았더라면

 

사람의 자손들은

우리와 같았을 것이다.

 

감각은 완전했을 것이며,

즉 대단히 예민함에도 불구하고

이성에도 복종했을 것이다.

 

 

감각이라는 말은,

육체적인 감각과 더불어

정신적인 감각도 가리킨다.

 

관능성으로 결합되지 않고

정신적 사랑의 유대로 결합된,

 

남편에 대해서나 자기에게서

태어난 자식에 대한 완전한,

 

여인의 완전함을 가지고

온전히 사랑하는 아들을 위한

온전한 사랑,

 

즉 완전한 사랑을

가졌을 것이다.

 

하와도 마리아처럼

사랑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즉 자식이 가져다주는

육체적 향락 때문이 아니라,

 

그 아들이 창조주의 아들이고,

인류를 번식하라는 창조주의 계명에

복종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했어야 했다.

 

 

또한 마리아도 자기 아들이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는

 

완전히 믿는 여인의

온갖 열정으로 사랑했었다.

 

예수에 대한 마리아의 사랑이

너무 다정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마리아가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해 보라고 말하겠다.

 

마리아는 죄 없는 여인이었다.

따라서 하느님과 부모와 남편과

 

아들과 이웃에 대한

그의 사랑에는 결함이 없었다.

 

 

또 어머니가 나를

그의 태중에서 나온 아들로

보는 것 외에

 

또 무엇으로 보았는지를

생각해 보라고 말하겠다.

 

끝으로 마리아의 국적을

생각해 보라고 말하겠다.

 

히브리 민족, 동방 민족이었고,

그것도 지금 시대보다 너무 멀리

떨어진 시대의 여인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요소에서

너희들에게는 과장된 것으로

보일 수 있는 과장하는 사랑,

 

과장하는 말에 대한 설명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보통 말에 있어서까지도

화려하고 장중한 어투가

동방의 어투, 히브리인의 어투다.

 

그 시대에 쓰인 이 민족의

모든 글이 이것을 증명하며,

 

세월이 흘렀는데도

동방의 말투는 많이 변하지 않았다.

 

너희들이 20세기가 지난 지금,

생활의 퇴폐가,

 

이렇게 큰 사랑을 죽이는

이때 살고 있기 때문에,

 

이 책에서까지도

너희들 시대처럼 냉담하고

경박한 여자 같은,

 

나자렛 마리아를

만나야 한다고 주장하겠느냐?

 

 

마리아는 마리아대로 있으며,

온순하고 깨끗하고 다정스러운

이스라엘의 딸,

 

하느님의 정배,

하느님의 동정녀인 어머니를,

 

너희들 시대처럼 지나치게 병적으로

흥분한 여자나 냉랭한 이기적인

여자로 바꿀 수는 없다.

 

마리아에 대한 예수의 사랑을

너무 다정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예수 안에는 하느님이 계셨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온 인류를 대신해

고통으로 당신께 갚는 여인인,

 

마리아를 사랑하시는 데서

위안받으셨다고.

 

 

인류를 대신해 고통으로 갚는 것은

하느님께서 피조물에게 돌아오셔서

 

그것을 자랑삼으실 수 있게 하고,

하느님 나라의 주민들에게도

준비하는 방법이다.

 

끝으로 어떤 사랑이든지

질서를 어길 때,

 

즉 하느님의 뜻과 지켜야 할

의무를 어길 때,

 

또 그때만 죄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라고 말하겠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해 보아라.

마리아의 사랑이 이렇게 하였는가?

내 사랑이 그렇게 하였는가?

 

 

마리아는 내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모든 것을

이기적 사랑으로 막았는가?

 

혹 내가 어머니에 대한

도를 지나친 사랑으로

내 사명을 포기하였는가?

 

아니다.

어머니의 사랑도 내 사랑도

오직 한 가지 소원밖에 없었다.

 

즉 세상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들에게

모든 작별 인사를 했고,

 

아들도 어머니에게

모든 작별 인사를 했다.

 

 

고통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것을

느끼는 우리의 인성과

 

병이 드는 것을 느끼는

우리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머니는 아들을

공공연한 가르침의 십자가와,

 

갈바리아의 십자가에 내주면서

그렇게 하였고,

 

아들은 어머니가

공동 속죄 자가 되도록 고독과

애를 끊는 듯한 괴로움에

 

어머니를 내맡기면서

그렇게 하였다.

 

이것이 마음 약함이냐?

감상적인 태도냐?

 

 

사랑하는 걸 알지 못하고,

사랑과 사랑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게 된 사람들아,

 

이것은 완전한

사랑이다.

 

또 이 저서는

어떤 복잡한 일련의 상황이

 

어둠으로 덮여있는

밝은 복음서 그림에 어두운 부분을

만들어놓은 것처럼

 

급격한 변화 같은,

이 삽화에서 저 삽화로 건너가며

이해하기 어렵게 되는 점들을

 

명확히 해주는 것을

목적으로도 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점들인데,

 

이런 점들을 해명해야

조성된 어떤 상황과,

 

내가 쓸 수밖에 없었던

어떤 강한 방식과,

 

완고해서 어떤 방법으로도

회개시킬 수 없는 적대자들에 대한

 

어떤 엄격함을

정확히 이해하는 실마리들을

찾아내게 된다.

 

이러한 방식들은,

용서하고 온화하고

겸손하라고 하던

 

끊임없는 내 권고와는

너무나 대조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너희 모두는,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모든

자비를 쓰신 다음에는,

 

당신의 인자 때문에

당신의 참을성을 남용하고

 

당신을 시험해도 괜찮다고

믿는 자들에게,

 

당신의 명예를 위해

‘그만해 둬라.’하고

 

말씀할 줄 아신다는 것을

기억하여라.

 

하느님을 조롱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지혜로운 말이다.

 

 

넷째.

 

복잡하고 오래 계속된

내 수난을 정확히 알리는 것.

 

내 오랜 수난은 몇 시간 동안에

완수된 피 흐르는 수난에 의해

절정으로 갔었지만,

 

오랜 세월 동안 나를 들볶았고

계속된 매일매일의 고통으로

점점 더 커졌다.

 

또 내 수난과 더불어

똑같은 기간 동안,

 

심장이 고통의 칼에 꿰뚫리는

내 어머니의 똑같은 수난도

정확하게 알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앎으로 인해

너희들이 우리를 더

사랑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다섯째.

 

내 말의 힘과

내 말을 받는 사람이

 

착한 뜻을 가진 사람

무리에 속하느냐,

 

또는 결코 올바르지 못한

관능적인 뜻을 가진 사람 무리에

속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사도들과 유다, 이것이 상반되는

두 가지 본보기다.

 

사도들은 대단히 불완전하고,

촌스럽고, 무식하고 과격했다.

 

 

그러나 착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유다는 사도들 대부분보다

더 유식하고,

 

수도와 성전에서 살았기 때문에

세련되었었다.

그러나 악의를 가지고 있었다.

 

사도들이 선으로 발전해 가고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고,

 

악으로 발전하고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아라.

 

특히 정신적 통찰력

부족으로 인한

무겁고 어두운 세력에 대한,

 

어려운, 대단히 어려운 싸움으로

성덕에 이르는 사람을,

 

 

정열이 없고 감정 움직임이 없는,

따라서 공로가 없는

부자연스러운 사람을 만들고

 

성인의 실체를

왜곡하는 사람들은,

 

착한 열한 사도의 완전을

향해 가는 발전을 지켜보기 바란다.

 

공로는 바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덕택으로,

 

억제하는 도는,

지나친 열정과 유혹에서 오는

승리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나친 열정과 유혹을

억제하는 것은,

 

영원히 하느님을 누린다는

최후의 목적에 이르기 위함이다.

 

 

회개의 기적은

오직 하느님으로부터만

오게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지켜보기 바란다.

 

하느님께서는 회개를 위한

방법을 주신다.

 

그러나 사람의 자유를

억제하지는 않으신다.

 

그러므로 사람 자신이

회개하기를 원치 않으면,

 

다른 사람을 회개하는데

소용되겠지만

 

그에겐 쓸데없는 일이

될 것이다.

 

 

내 말의 여러 가지 결과를

검토하는 사람들은,

 

인간적인 사람뿐 아니라

영적인 사람에게 미치는 결과도

지켜보기 바란다.

 

영적인 사람뿐 아니라

인간적인 사람에게 미치는 결과는,

 

착한 뜻으로 받아들인 내 말을

그들은 외적 완전과

 

내적 완전으로 이끌고 가서

양쪽을 다 변화시킨다.

 

그들의 무식과

내 겸손으로 인하여

 

 

사도들은 사람의 아들을

지나치게 허물없이 대했었고,

(그들 가운데 착한 선생이었지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아무리 부담 없이 굴어도 괜찮은

겸손하고 참을성 있는 선생이었다.

그러나 그들 경우에는

존경심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무식해서 그런 것이었다.

따라서 용서할 만한 것이었다)

 

자기들끼리 잘 다투고, 이기적이고,

그들의 사랑과 내 사랑에 대해

질투하고,

 

백성들을 대할 때 참을성이 없고

‘사도'이기에 좀 교만했고,

 

깜짝 놀라게 하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군중에게 보여 주기식의 이상한

일을, 할까 봐 몹시 걱정했는데,

 

그들은 천천히, 그러나 끊임없이

새 사람으로 변하여,

 

 

처음에는 나를 본받으며

기쁘게 하기 위해

그들의 정열을 억제했었고,

 

그다음엔 점점 더

나의 참된 자아를 알게 되었고,

 

나를 하느님인 주님으로 보며

사랑하고 대우할 정도로

 

그들의 태도와 그들의

사랑이 바뀌었다.

 

혹 그들이 내 지상 생애가

끝날 무렵에서도

 

처음 시기의 경박스러운

유쾌한 친구들이었느냐?

 

특히 부활한 뒤에도 사람의 아들을

친구로 취급하는 친구들이었느냐?

 

 

그렇지 않다.

그들은 우선 왕의 대신들이고,

 

그다음에는

하느님의 사제들이다.

모두가 다르게 완전히 변하였다.

 

묘사된 대로 사도들의 성질이

거칠다 생각하며,

 

반자연적이라고 판단할 사람들은

이것을 고려하기 바란다.

 

나는 까다로운 박사도 아니었고

교만한 왕도 아니었으며,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선생도 아니었다.

 

 

나는 관대할 줄을 알았다.

나는 가끔 내 지식의 향기를 잃고,

 

그들 지식을 뽐내려는 선생들을

꼼짝 못 하게 하기 위해

 

거친 재료들을 가지고

그것들을 육성하고자 했고,

 

갖가지 빈 그릇에 완전을

가득 채워, 하느님께선 무엇이든

하실 수 있다는 것,

 

돌로 아브라함의 아들,

하느님의 아들을 만들어내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가지고

선생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여섯째.

 

끝으로 유다의 수수께끼를

너희들에게 알게 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많이 베풀어 주신 한 영혼의

타락이라는 그 수수께끼를.

 

이 수수께끼가

사실은 너무나 자주 되풀이 되고

 

너희들 예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상처가 되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종과 아들이었던 것이

마귀로 변하고 은총을 죽임으로써

 

하느님을 죽이는 사람이 되는지를

너희에게 알게 하여

 

 

너희들이 구렁으로 떨어지는 길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고,

 

구렁을 향해 가는 어린양들을

말리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려 하는 것이다.

 

너희들 지혜와 지능을 집중해

유다의 소름 끼치는,

 

그렇지만 흔한 모습을

연구하여라.

 

너희들이 이러저러한 사람들에게서

발견하고 또 싸워야 하는,

 

중대한 모든 죄종(罪宗)이 뱀처럼

꿈틀거리고 있는 그 모습들을.

 

이것을 너희들은 특히 배워야 하는

교훈이다.

 

 

이것이 영적 선생과

영혼 지도자로서

 

너희 성직 수행에 있어서

너희들에게는 가장 유익한

교훈이겠기 때문이다.

 

어떤 생활 상태서나

자기를 사탄에게 넘겨주어

 

영원한 죽음을 만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일곱 부분이 있는 것처럼

일곱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일곱 부분은,

 

 

1. 복음 준비

(평생 동정인 마리아의 티 없는

잉태부터 성 요셉의 죽음까지)

2. 공생활 첫해

3. 공생활 둘째 해

4. 공생활 셋째 해

5. 수난 준비

(데벳에서 니산까지,

즉 라자로 죽음의 고통에서부터

베다니아의 만찬까지)

6. 수난

(라자로와의 작별에서

내가 무덤에 묻히는 것,

그리고 부활 날 새벽까지)

7. 부활에서 성령강림까지

 

내가 일러 주는 것처럼,

여러 부분을 이렇게 나누는 것을

따라야 한다.

 

이 구분이

옳은 것들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들 하겠느냐?

너희들 선생인 나에게

무슨 말을 하겠느냐?

 

너희들은 내게 말을 하지 않는다.

너희들 마음속으로 말을 하고,

 

또 그렇게 할 수만 있으면

작은 요한에게 말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너희들을, 내가 너희들 보기 원하는

그 정의를 가지고 말하진 않는다.

 

왜냐하면 너희는

너희들 동료고 하느님의 도구인

그리스도인에 대한 사랑을 짓밟음으로

 

작은 요한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그에게 말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진정으로 말하지만,

내 도구가 된다는 것은

걱정 없는 기쁨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피로와 노력이고,

모든 일에 있어서 고통이다.

 

세상이,

선생에게 준 것 그것을,

즉 고통을,

 

선생의 제자에게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어도 사제들,

특히 동료들이

 

십자가를 지고 나아가는

이 작은 순교자를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 마음속으로

너희 자신에게 말할 때,

 

교만과 질투와 불신과 그 밖에

여러 가지 불평을 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 불평과

너희의 분개한 놀람에 대해

해답을 주겠다.

 

최후의 만찬을 먹던 저녁에,

나는 나를 사랑하던 열한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위로자이신 성령께서 오시면,

내가 너희에게 말했던 모든 것을

다시 일깨워 주실 것이다.’

 

내가 그 말을 할 때

내 머릿속에는

그곳에 있던 제자들 외에,

 

영과 진리와

그렇게 되고자 하는 뜻으로

 

그리고 앞으로 내 제자가 될

사람들을 항상 생각하고 있었다.

 

벌써 당신의 은총으로

너희들에게 하느님을 기억하는

능력을 넣어주신 성령께서는

 

 

영혼들을,

원죄로 인한 몽롱한 정신

상태서 끌어내고,

 

영적 시각과 지식을 누리라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영의 통찰력을,

 

아담의 비참한 유산 때문에

둘러싸여 있는 어두움에서

구해 내심으로써,

 

내가 말한 것을,

당신의 인도를 받는 하느님 자녀인,

사람들 마음속에 ‘다시 일깨움으로’

 

스승으로서의 당신 일을 완성하신다.

이것이 복음을 이루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일깨운다’는 것은

그 정신을 비춘다는 말이다.

 

 

만일 복음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 말씀을 상기하고

기억하고 있는 것만으론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랑인 복음의 정신은

사랑으로써, 즉 성령으로써

이해하게 할 수 있다.

 

성령이,

복음서의 참다운 저자이신 것처럼,

복음서의 유일한 주석자도 되신다.

 

그것은, 어떤 작품의 저자만이

그 작품의 정신을 알지만,

 

작품을 읽는 사람에게 그 정신을

이해시키진 못하더라도

자신은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완전은

어느 것이나 결함이 많기 때문에,

 

인간인 저자가 성공하지 못한 것을

지극히 완전하고 지극히 지혜로우신

성령께서는 하실 수 있다.

 

사실 복음서의 저자이신 성령만이

하느님 자녀들의 영혼 안에

그것을 다시 일깨우고

 

해설하고 보충하시는

분이시기도 하다.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 모두를

되새김해 주실 것이다.’

(요한 14:26)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해 주실 것이다.

 

그분은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일러 주실 것이며

 

앞으로 다가올 일들도

알려 주실 것이다.

 

또 그분은 나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여,

나를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다 나의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내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알려

줄 것이라고 내가 말했던 것이다.’

(요한 16:13-15)

 

 

그다음으로,

성령이 복음서의 참다운

저자이신 만큼,

 

왜 이 작품에 있는 말들이,

그리고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

끝마치는 말로써,

 

그렇게 되었다고 이해시키는 말로

상기시키지 않으셨냐고

반론을 제기하면,

 

하느님의 생각은

사람들 생각과 다르고

 

그 생각은 항상 옳고

결정적인 것이라고 대답하겠다.

또, 만일 너희들이,

 

계시는,

마지막 사도와 더불어 마감되었고

그 사도가 묵시록에서,

 

 

‘누구든지 여기에 무엇을 덧붙이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을 벌하실 때

 

이 책에 기록된 재난도

덧붙여서 주실 것입니다.’(22:18)

하고 말한 것으로 보아

 

이젠 덧붙일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또 이 말은 요한 묵시록의

마지막 끝마무리가 되어

 

계시 전체에 대해 이해될 수

있다는 반론을 제기한다면,

 

이 작품에서는

계시에 덧붙인 것이 아무것도 없고,

 

다만 자연적인 원인과

초자연적인 뜻으로 생긴

빈틈들을 메웠다고 말하겠다.

 

 

또 마치 모자이크에

그 완전한 아름다움을

돌려주기 위해,

 

손상되었거나

빠져나간 돌들을 다시 끼워서,

모자이크를 보수하는 사람이

하는 것처럼,

 

내가 내 숭고한 사랑의

그림을 복구하고 싶다면,

 

그리고 이것을 인류가,

어둠과 공포의 구렁으로

뛰어드는 이 세기에 하려고

지금껏 보류했었다면,

 

내게 이렇게

못하게 막을 수 있겠느냐?

 

하늘의 빛과 목소리와

권유에 대해,

 

정신이 하도 흐려지고

귀머거리가 되고 약해진 너희들이

 

혹 이런 것이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정말이지 너희들은

너희들이 가지고 있지만,

 

이제는

너희 구세주를 ‘보는’것에

충분하지 못하게 된 빛에다가,

 

새로운 빛을 보태주는 것에 대해서

나를 찬미해야 할 것이다.

 

길과 진리와 생명을 보고

너희들 속에,

 

내 시대의 의인들이 받았던

그 정신적인 충격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기 위해,

 

그리고 이 지식을 통해

너희들 정신 안에

 

너희를 구해줄 사랑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것은 완덕으로

올라가는 일일 것이니까.

 

나는 너희들이

‘죽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잠들었거나 졸고 있어서

겨울잠을 자고 있는

나무들과 같다고 말하겠다.

 

하느님의 태양이

너희에게 그 찬란한 빛을 준다.

 

잠을 깨서

너희에게 주어지는 태양을 찬미하고,

 

그 태양이 너희들 곁에서

안에까지 덥게 해서

너희들 잠을 깨우고

 

너희를

꽃과 열매로 뒤덮게 하도록

기꺼이 받아들여라.

 

 

일어나서

네 하느님께로 오너라.

 

‘받아먹어라. 받아 마셔라.’하고

내가 사도들에게 말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또 너희에게 물을 청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너희가 나에게 청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샘솟는 물을

주었을 것이다’ 하고

 

내가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했다.

나는 이 말을 지금도 또 한다.

박사들과 사마리아인들에게.

 

이 양극단 계급의 사람들에게

이 말은 필요하고,

 

 

또 이 양극단 사이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 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박사들에게는

영양 불량이 되지 않고,

 

자신들을 위해서도

힘을 잃지 않고,

 

사람이며 하느님이며,

선생이고 구세주인

하느님을 알지 못해

 

활기를 잃은

사람들을 위한,

 

초자연적 양식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

 

사마리아인들에게는 그들이

샘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영혼들은

샘솟는 물이 필요하기 때문에,

 

 

박사들과 사마리아인들과

중간에 있는 사람들,

 

즉 중죄의 지위에 있진 않지만

게으름과 냉담과 성덕에 대한

그릇된 개념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그대로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이 물은 필요하며,

 

특히 자기들은

지옥의 길을 가고 있지 않고

계명을 잘 지킨다 생각하고,

 

복잡하게 얽힌

피상적 계율 준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깎아지른 듯 가파른 용맹의 길로는

한 걸음도 감히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 샘솟는

물은 필요하다.

 

 

그것은 이 작품을 읽음으로써

이들이 처음에 가졌던 자극을

다시 얻어,

 

그 수구(守旧)에서 벗어나 영웅적인

길을 시작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내가 너희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이다.

 

나는 너희들에게 이 음식과

이 신선한 음료를 준다.

 

내 말은 생명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들을,

 

나와 함께

생명 안에 데리고 있기를 원한다.

 

 

나는 정신의 생명이 되는

힘을 없애고 있는 사탄의 독기에,

 

균형을 잃지 않게 하려고

내 말을 증가시킨다.

나를 물리치지 말아라.

 

나는 너희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너희에게 나를 주기를 갈망한다.

 

내 갈망은 가라앉힐 수 없다.

나는 너희들을 천상의

혼인 잔치에 참석할 수 있게

 

준비시키기 위해 나를

너희에게 주기를 갈망한다.

 

그리고 너희가 활기를 잃고

시름시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너희가 세상이라는

함정과 가시덤불과

 

뱀이 가득 찬 이 사막에서

고생을 이기고 난 다음,

 

어린양의 혼인 잔치,

즉 하느님의 큰 잔치를 위해

꾸민 옷(완덕)을 입고,

 

너희들 안에 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길 속을

지나가도 손상을 입지 않고,

 

뱀을 밟고 독약을 마셔도

죽지 않게 되기 위해선

너희에게는 내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너희들에게

또 이렇게 말한다.

 

 

‘집어라.

이 책을 집어라.

 

그리고

봉하지 말고(묵시 22:10) 읽어라.

 

그리고 그때가 가까웠으니(묵시 22:10)

다른 사람에게도 읽게 하여라.

 

그리고 거룩한 사람은 더

거룩하게 되게 하여라.’(묵시 22:11)

 

이 책에서

내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며,

너의 이 가까이 옴이 이루어지고,

 

이들을 지키기 위해

‘주 예수여, 오소서!’ 하고

 

사랑의 부르짖음으로 청하는

모든 사람에게,

 

너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있기를 바란다.”

 

 

여기까지 하신 다음 예수께서는

내게 따로 말씀하신다.

 

“이 작품 첫머리에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18절까지,

써진 그대로 전부 써넣어라.

 

요한이 네가 이 책에서 이야기한

모든 말들을 쓴 것처럼

 

그 말들도 하느님의 성령께서

불러주셔서 쓴 것이다.

 

주기도문과 최후의 만찬 후에

내가 드린 기도에도

 

보탤 것도 뺄 것도 도무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보탤 것과 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 점들에 대한 모든 말들은

하느님의 보석이어서

만져서는 안 된다.

 

이 점들에 대하여할 일은

한 가지뿐이다.

 

성령께 그 아름다움과 지혜를 모두

밝혀 주시기를 열렬히

기도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고 나서

내 공생활이 시작되는

시점에 이르러,

 

요한복음 1장 19절부터 28절까지와

루가복음 3장 3절부터 18절까지를

전부, 마치 한 장인 것처럼

차례로 베껴 놓아라.

 

 

거기에는 말이 별로 많지 않고,

심한 고신 극기 하는 고행자인

선구자 전체가 소개되어 있으며,

 

다른 말은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런 다음 내 세례 이야기를 하고,

 

내가 그때그때 일러준 것과 같이

계속해서 나아가라.

 

그리고 네 피로도

끝났다.

 

이제는 사랑과

즐거움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네게 주는 상이다.

 

내 영혼아, 이제 네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느냐?

 

너는 내게 몰입한 정신으로

‘주님, 이제는 당신 종인 저를

어떻게 하시렵니까?'하고 묻는다.

 

 

나는 ‘질그릇을 깨뜨려서

그 정수(精髓)를 나 있는 데로

가지고 가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둘에게

기쁨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얼마 동안

네가 필요하다.

 

네 안에 머물러 있는

그리스도 냄새인 네 향기를

발산하기 위해

 

아직 얼마 동안 너를 여기에

두는 것이 필요하다.

 

그때는 내가 요한에게 말한 것처럼

네게 말하겠다.

 

‘만일 내가 너를 데리러 올 때까지

네가 그대로 있기를 원한다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하고.

 

지칠 줄 모르는 내 목소리였던

귀여운 너에게 평화,

너에게 평화, 평화를 주마.

 

선생님이

‘고맙다’고 네게 말한다.

 

주님이 ‘복을 받아라’하고

네게 말한다.

 

예수, 네 예수가

네게 이렇게 말한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것이 즐거우니까

항상 너와 함께 있겠다.’ 하고.

 

작은 요한아,

내 평화를 받아라.

내 가슴에 와서 쉬어라.”

 

(이 말씀과 더불어

작품의 편집에 대한 조언도 주셨고,

마지막 해석도 주어졌었다.)

 

- 비아렛지오에서 1947년 4월 28일

마리아 발또르따 -

 

 

 

 

출처: 마리아 발또르따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https://cafe.daum.net/xp8046/YXDQ/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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