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17. 14:20ㆍ카르마의 영혼
<나는 영계를 보고 왔다 (5)>
-3세계는 어떤 인간이 가는가?-
나는 영계에는
상, 중, 하 3세계가 있고,
‘지하의 영계’라 할 수 있는
지옥계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앞에서 기술했다.
영계 일을 기록하는
마지막 장으로
나는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사에 대한 답을 쓰기로 하겠다.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인간이었을 때 생애와
죽은 후 인간 영이 가게 될
영계와 사이엔 어떤 관계가
있는가일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이 하겠다.
관계가 있고 없고
정도가 아니다.
인간이었을 때 생애가
죽은 후 그대로
영원한 삶을 보내게 될
세계를 거의 다 결정해 버린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그건 종교 등의 가르침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말해 온 것이며
종교의 교의 같은
종교적 방편이며 가공된 것을
나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것은
표면적으론 비슷하고
또 결과적으로도
종교에서 설파하는 내용과
중첩되는 부분은 있어도
종교에서 말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것이다.
이에 대해선 앞에서 지옥계를
말할 때 조금 언급해 두었으므로
사람들은 이해하리라 믿는다.
즉 종교에서 말하는 바는
그 종교의 교의에 맞는 생애를
보내고 죽으면
그 보수로
행복한 세계로 갈 수 있고
종교 교의에 맞지 않는 생활을
하면 그 벌로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계에선 영들이
행복한 세계에 들어가는 것도
또 반대로 지옥계로 가는 것도,
인간일 때 생애로 인한
보수나 벌로서 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었을 때
생애에서 그의 영적 내심(內心)이
영계의 어느 세계에서 가장 잘
반응하고 대처할 수 있는 것이
되어가는가에 따라서,
죽은 후 그의 영 자신의
스스로 의지로 선택하게
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상 세계서 살기 위해선
영의 영적 마음의 창, 즉 영류를
받아들이는 창이 그만큼 열려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중 세계나 하 세계 영류에
맞을 만한 영류의 창밖에 갖지 못한
영이 상 세계로 들어가면,
그 영류의 강렬함이나 빛의
밝음에 견뎌내지 못하고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며,
영적인 영원한 삶을 온전히
보내지 못하게 된다.
요컨대 영적 영류의 창이 어떻게
열려 있는가가
그가 살게 될 죽은 후의 세계를
결정하는 것인데,
그 창이 열려 있는 정도는
인간이었을 때의 생애에 있어서
얼마나 영적 마음을
열었는가의 결과다.
그러면 어떤 인간의 생애가
영적 창을 연 생애며,
어떤 생애가
열려 있지 않은 생애일까?
여기에서 사람들은 또 하나의
의문에 마주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영이라든가, 영적 창이라든가,
영적 눈이 뜨인 사람이라든가 하는
영에 관한 일은,
너무나 심원하고 높은 경지라서
인간이 생각해 볼 수 없는 것이란
일반적인 생각으로
여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보고 말하라 한다면
그런 생각 자체가 이미
정직하고 순진한 마음을 잃어가고
있는 사람의 잘못된 감각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원래 육체를 가진
물질계만 속한 것이 아니라,
영계와 물질계
양쪽에 속한 존재이므로
영적 일을 생각한다는 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마음의 창이 열린
생애란 간단히 말하자면,
영계의 질서를 알고
이에 순종하며 따라가는 생애를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영계 질서는
인간에게 순종의 마음만 있다면
그 존재를 느낄 수 있고
그 모습을 좀 더 구체적으로
지성으로 알아가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사는 자연계와
사이에는 상응(相應)의 이치로
사물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인간계, 자연계에 있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대응물 전부가
영계에도 있고,
쉽게 보면 영 그 자체가
육체의 인간과 너무나도 닮은 존재,
즉 인간과 상응한 물임을 내가 이미
지금까지 기술한 것만으로도
잘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을 유순하게 해서
자연계를 바라본다면
새나 짐승이나 곤충 등의 동물계든
나무 같은 식물계든
모든 생명 있는 것은
불가사의한 자연계 질서에 의해
생활하고 있다.
이 불가사의한 질서에
솔직하게 감탄하며,
그 질서에 따라
순종의 마음과 통찰력으로
생활하려는 인간은
이미 그 마음에 영계 질서란 것을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는 사람이다.
영계 질서가 자연계 질서와
다른 점이 있음은 사실이지만
질서라는 불가사의한,
인간 생각을 초월한 통일적 세계라는
점에선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런 질서를 희미하게나마
자신 마음속에 느끼고,
이 질서 따라 생애를 보내는
사람은 영적 마음의 창이
열려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죽은 후 영계로 가게 되면
그 즉시 영계 질서의 진정한
뜻을 이해하고
이에 따른 영으로서의
생활을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바로 이런 사람이
상 세계로 가는 사람들이다.
이 영으로서 마음의 창이
많이 열리지 않은 사람은
그 정도에 따라
중 세계 또는 하 세계서
살게 되고,
그 창이 전혀
열리지 못한 사람은
영계 빛을 견뎌 낼 수 없어
지옥계로 가게 된다.
종교 등에서 말하는 교의는
그 교의가 진정한 것이면
이를 따르는 일반적 경우
영적 마음의 창을 여는데
필요한 것이 된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 가지고
마음의 창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몇 번이나 내가 말한
‘정직하고 솔직한 마음’인 것이다.
또 표면적, 외면적,
세속적 지식만으로
영으로의 마음의 창을
열 수 있단 걸 단정할 수 없고,
이 경우엔 반대로 마음의 창을
닫아버리는 일도 많이 있다.
나는 영계에서,
세상에 있었을 땐 사람들에게
학자, 현자로 숭앙받던 사람이
영적 이성에 있어선,
사회적 지식들이 전혀 없던
사람들보다
훨씬 뒤진 영으로 사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다.
그것은 지식이나 학문을
영적 마음의 창을 열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고,
반대로 이 세상을 사는
수단으로만 이용함으로써
이것에 의해 그들의
‘정직한 마음’을 잃게 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당신도 가능한 정령과의 대화-
정령과 인간과의 대화가
매우 위험한 이유는
정령은 아직 정령계에서 선별을
거친 영이 아니므로 그 가운데는
흉령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정령에는 아직 이 세상에
있던 인간 기억이 아직
어느 정도 남아 있어서
이것이 대화를 나누는 상대방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흔히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것을 나 자신 경험과
내가 본 몇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기로 하겠다.
나는 그때 나의 영을 육체로부터
이탈시켰는데, 그 이탈 정도가
낮았으며 전술한 바와 같이
나의 영은 아직 육체를 상공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육체 죽음 상태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내 육체를 보고 있었다.
그때 나의 영이 갑자기
기절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정신을 차리고
나의 육체를 보니 그 옆에
정령 하나가 앉아서
나의 육체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나의
육체 안에 깃들어 있는
나의 영과
상념 교류를 시도하려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상념 교류로
나의 영 내부에 자신을 흘려보내는
일에 성공하면 나의 영을 쫓아내고
나의 육체를 자기 마음대로 하려
했음이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얼굴
안면 반쯤은 거무튀튀하고,
다른 쪽 뺨은 뭉개져 없어진
흉측한 모습의 흉령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흉령은 항상 이 같은 의도를
지니고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때 나의 영은 육체에
있지 않아서 상념 교류를
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어느 틈엔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만약 그때 내가 영의 육체 분리
상태에 있지 않고,
또 그와 상념의 교류를 했다면
하는 생각을 하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러면 정령과 인간과의 직접적인
대화나 교류는 어떻게 이루어
지는 것일까?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기로 하겠다.
“나는 영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얼마 동안이나
그렇게 하고 있었는지 나 자신도
분명치 않았지만,
갑자기 나는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것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마치 물체 같은 모습으로
내 육체 안에 있는 것이
내 눈으로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은 나 자신도 처음 겪는
일이었고, 또 다른 사람에게
들은 적도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이 돌아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나는 공포에 질려 명상에서
보통 상태로 돌아가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엔 좀 더
기묘한 일이 시작되었다.
몸 안에서 나에게 말을 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공포감은 절정에
달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침대 위에 조용히
눕혀져 있었다.
내가 정신을 잃기 전
내 속에서 일어났던 불가사의한
사건을 다시 생각해 봤지만,
그것은 생각만 해도
나에겐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로
무시무시한 경험이었다.”
이 사람은 육체의 인간이면서
정령과 대화해보려고
시도한 것이었다.
정령과 인간과의 직접적 대화가
시작되는 전조는,
이처럼 자신 육체 안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보이듯 느껴진다.
이것은 정령의 상념이 그 사람의
영적 상념 속에 흘러 들어와
마치 자연적인 상념처럼
차츰차츰 침투하기 시작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정령의 상념이 인간의
영적 상념으로 흘러 들어와,
다시 자연적인 상념처럼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흉령일 경우의 위험성-
정령은 자기 이외에 다른 영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
자기가 세계의 전부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육체에
상념으로 흘러 들어갔다 하더라도
그는 그것을 전혀 모른다.
만일 그에게 인간이 눈에
보였다 하더라도 그는 그 인간도
자기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정령과 인간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 정령은
자기 이외의 대화 상대, 즉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정령이 선령(善靈)이었을 경우엔
흉령의 인간같이 자기 이외의
다른 자에 대한 악의는
이 세상 인간들 사이에 있던
악의보다 더 지독한 정도의
악의가 있다.
이것은 정령계에 관해
언급했을 때 설명했던 것처럼
그 흉령의 악의는 그가 인간이었을
때는 사람들 평판이나 속세 적
타산 때문에 숨기고 있던 악의가
정령이 됨으로써 더 적나라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흉령이 인간과 대화를 나눈 결과
인간의 존재를 알게 되면,
그는 인간에게 온갖 악의의 이빨을
들이대고 마침내는 그 육체를
멸망시키는 일이 적지 않다.
인간은 흉령과 대화를 나누어도
모든 영이 성령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리고 흉령은 인간과 대화를
나누어도 자기 이외의
‘인간’은 없으니까
다른 세계도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임에도 인간은
자기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영인 이상
언제나 성령이라
생각하기 쉽다.
이러면 인간은 이 육체 안에 있는
영의 목소리에 의해 열광적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려 한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성령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큰 착각을 하고
때로는 살인과 도둑질, 그 밖의
여러 가지 나쁜 일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고,
결국 자기 몸을 망쳐버리게 된다.
그러면 정령과 대화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실례를 들어
소개해 보기로 하겠다.
약 50년 전에 전쟁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죽은 일이 있는
네덜란드의 한 시골에 살던
‘스필레’라는 농부는
어느 날 밭에서 일하던 중
별안간 정령의 내방을 받았다.
즉, 갑자기 이상한 정신상태에
빠졌다는 느낌이 들자마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령과의 대화를 시작한 것이었다.
‘스필레’는 정신없이
외쳤다.
“당신은 무엇인가? 내 뱃속에서
목소리를 내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야?
악마인가? 아니면 악령인가?
내 뱃속에 어째서 함부로
들어와 있는가? 어서 꺼져라!”
이에 대해 정령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는 당신의 주인이다.
당신은 나의 종에 지나지 않으며,
당신은 지금 그 육체를
빌려 가지고 있는 것뿐이다.
당신은 내 말을 잘 듣고
내 명령을 따라야 한다.”
스필레는 이 이상한 말을 듣고는
너무 놀란 나머지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이때 스필레의 모습을 보고 있던
같은 마을의 농부들은
스필레가 큰 소리로 단말마 같은
외침 소리를 질렀기에
깜짝 놀랐으나 다음 순간은
괭이를 손에 든 채 그는 멍청한
눈으로 하늘을 쳐다보고
정신 나간 상태로
밭 가운데 서 있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그를 집으로
데려가 주었지만 정신상태가
회복된 다음부터는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별개의 사람이 된 듯
가끔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혼 잣 말을 하게 되었다.
마을이 스필레의 방화로 인해
많은 사상자를 내고,
스필레 자신도 죽은 것은
그로부터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이 사건은 스필레가
발광한 것이라고 결론지어졌지만,
나는 이것이 정령과의 대화에 따른
위험의 한 경우라 생각하고 있다.
그에게 정령의 상념을 심어준
정령은 아마도 과거에 그 마을에서
학살당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약 5 백 년쯤 전의
전쟁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의
정령이었을 것이다.
이 정령의 기억이나 상념을
스필레는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고
그 정령이 되어서 복수를
했을 것이다.
또 열 살이 채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한 번도 가 본 일없는 고장의
모습을 자세히 알고 있거나
그 자신이 옛날에 어디에
살고 있던 누구라고 주장하는
일이 가끔 있다.
이런 경우는 그 어린아이를
본인이 말하는 고장으로
데리고 가면,
그곳이 설사 다른 나라라 하더라도
지금까지 전혀 배운 일이 없는
그 나라 말로 그 고장 사람들과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있다.
이 같은 예는 환생이라는 일과
혼동하기 쉽지만,
실은 정령과
대화에서 그 정령의 기억이,
인간 속에 의젓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영계와 이 세상과의 관계-
지금까지 영이나 영계에 관해
나 자신이 영의 세계,
사후의 세계에서
내가 보고 온 것을 거의 다
이 수기에 썼다.
이제 수기의 마지막에 와서
영계와 이 세상, 즉 영계와
자연계와 관계,
영과 인간과의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에 대해
설명하기로 하겠다.
나 자신으로선 이 수기 전체가
내가 이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유서인 셈이지만,
지금부터 내가 쓰려는 영과
영계와 인간과 이 세상과의 관계가
나의 유서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내가 기술하는 모든 것은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밝히지 못한 내용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
영계와 이 세상 자연계 사이에는
‘대응의 법칙’이란 것이 있다.
영계는 이 세상처럼
모든 것이 물질적 형태로
되어 있지 않지만
그와 대응한 것이
존재하며,
이 세상에 없는 것까지
존재하리란 것을 일반 사람들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영계와 이 세상 공간이나
위치 관계에 대해서도 앞서
설명한 바 있다.
나는 여기서 이 관계에 대해
좀 더 본질적인 것을
설명하기로 하겠다.
영계와 이 세상은
다른 세계지만,
동전의 앞뒤처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게 연관되어
있다는 걸
이 수기 앞부분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지금 이 말에 수정을 가해
좀 더 정확하게 말하려 한다.
영계와 이 세상은
실제는 별개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큰 세계며,
영계와 이 세상을 포함한
두 가지 다른 부분인 한 세계다.”
이렇게 다른 부분에
지나지 않는 양자 사이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전혀 다른 세계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결코 변할 수 없는
하나의 세계인
두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 관계를 동전에 비유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한 개의 동전 앞뒤처럼
떨어지고 싶어도 떨어질 수 없게
단단히 붙어서
굳게 맺어진 것이 아니라
본래가 한 개 동전
앞뒤의 것이다.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해 보자
영계 태양에서 흘러나오는
영류(靈流)가
영계 생명의 근원이란 것은
이미 말한 바 있다.
이 영류에는
영계의 상, 중, 하 3세계에
태양에서부터 직접적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과,
태양→상세계→중세계→하세계
경로를 거쳐 각 세계로
간접적으로 흘러 들어가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마음속에 기억해 두길 바란다.
내가 이 영류에 관해 설명했을 때
영류는 하 세계까지 밖에
도달하지 못한 것처럼 말해 두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영류가
하 세계서 다시 인간세계까지
도달한다고 수정하겠다.
인간 생명이 우주 공간에서 홀로
뚝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님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인간 생명은 생명의 근원인
원천(源天)과의 관계로 인해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면 생명의 원천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영계의
태양인 것이다.
자연계 태양은
열이나 빛을 자연계에 부여함으로써
자연계 생명을 길러주고
생명 활동도 도와줄 수 있다.
하지만 생명의
원천 자체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연계 태양은
영계 태양의 대응물로써
이를테면 이 세상을 대리한
대용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 태양의 원초(原初)는
영계 태양인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에게 큰 의문이
생길 것임이 틀림없다.
첫째,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해서
영계 태양으로부터 영류를
받는 것인가?
둘째,
영계 존재가 아닌 인간이 어떻게
영계 태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영류를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의문에 다음과 같은
답을 하겠다.
인간 생명의 근원은
본래가 영인 것이다.
그리고 인간 육체 안에 사는 영이
영류를 자신 안에 흡수함으로써
인간은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이 대답 자체가
아직 충분하게 설득되지
않을지 모른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의문이
일어나겠지만,
이 의문은 이 장 설명을
끝까지 읽으면 자연히 알게 되는
문제일 것이다.
인간 육체 안에
영이 깃들고 있는 비밀은
영과 육 두 개의 성질은
다른 공간적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좀 다른 관점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예를 들어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어떤 축복의 말을 해주고 싶단
생각을 품고 있다 하자.
하지만 단지 마음속에 그렇게
생각만 하는 것으론 그 의사가
완결되고 완성되었다 할 수 없다.
그것이 완성되려면 그것을
언어나 편지 형태로 드러내야 한다.
영계와 이 세상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다.
물질계가 아닌 영계가
그 의도나 의사를 물질계서
드러내어 완성하려면
인간이라는 물질적 형태를 지닌
영에게 부여하지 않고는 안된다.
그러므로 인간계는 영계의
종극점(終極點)이며,
영계 생명의 근원인 영류도
그 종극 적 수단인,
인간 육체 속에
영을 깃들게 함으로써
영이 이루고자 하는
최종 목표를 달성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계 태양에서 발한
영류는 그 종극점인 인간 육체에
이르러 최종적 흐름을 멈추게 된다.
이상의 설명으로 영계와 이 세상이
하나의 세계로 두 부분만이
다르다는 것을 밝힌 셈이다.
이것을 영계 쪽에서 보면
아주 간단한 일이지만,
두 부분을 구별하는 분수령이
인간 육체의 죽음이라는 것이며,
이 죽음의 경계는
영과 영계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인간에게는 너무도 중대한 것이다.
출처: 엠마누엘 스웨덴보그
-나는 영계를 보고 왔다-
'카르마의 영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혼의 자서전 (3) (2) | 2024.10.10 |
---|---|
계 사 전 (11) | 2024.09.06 |
나는 영계를 보고 왔다 (4) (0) | 2024.07.15 |
나는 영계를 보고 왔다 (3) (0) | 2024.07.11 |
나는 영계를 보고 왔다 (2) (0) | 2024.0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