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의 벌레

2022. 9. 21. 04:57카르마의 영혼

 

<양심의 벌레>

 

지극히 사랑하는 딸아,

그들이 나의 세 가지 질책 가운데

 

이 두 번째 질책을 피부로 느끼게

되는 것은, 그들 자신이 결코

돌아설 수 없는 최후 시점에,

 

자신의 이기적 사랑 때문에

눈이 멀어 버렸던 양심의 벌레는

다시 시력을 회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죄가 그들을

이런 사악한 결과로 몰아넣었다고

깨달으면서, 이 양심의 벌레는

 

자책 형태로

자신을 갉아먹기 시작한다.

 

이런 영혼이, 스스로 죄를 인식하고

죄송스러워할 수 있는 빛을

지니고 있다면,

 

그들은 다시 나의 자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빛 없이

양심의 벌레만 지닌 채

 

성혈에 아무런 희망도 갖지 않거나

나에게 무례한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보다도,

 

자신들 처한 곤경 때문에

슬퍼한다면, 그들은 영원한

저주를 받고 말 것이다.

 

이럴 때 내 정의는 그들의 불의와

그릇된 판단을 혹독하게 질책한다.

 

그들이 세상에 사는 동안

습관적으로 널리 자행했던 불의와

 

그릇된 판단을 총체적 관점에서

질책당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사악한 처지를

 

내 자비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그 특정한 거짓 판단에 대해서도

훨씬 가혹하게 질책당할 것이다.

 

 

내 자비를 거절하고 비웃는 이 죄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다.

 

이것은 그들이 그동안 범한 다른

모든 죄를 합친 것보다 더 나를

모독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자비를 거절하고 비웃었던

유다의 절망이, 그가 행한 배신보다

나를 더 불쾌하게 만들고

 

내 아들에게도 더 큰 모독이 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은

자기네 죄를 내 자비보다

더 큰 것으로 간주하는

 

이 그릇된 판단으로 인하여

질책을 당하는 것이니,

 

이로써 그들은 마귀들과 함께

처벌받고 영원한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무례한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보다

 

그들 자신의 멍에를

훨씬 더 서러워하는

그 불의에 대해서도 질책당한다.

 

그들이 이 점에서도 불의한 까닭은

내 것을 내게로 돌리지 않고

 

그들 것은 스스로

만들어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를 거슬러 범한 죄들은

내 현존 안에서, 마음으로부터

 

애절하게 통회하고

사랑을 바칠 의무가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정반대로 행동해 왔다.

 

그들 자신에게는 부드러운 사랑을

풍성하게 한없이 쏟았으면서

자기 죄로 말미암아 받게 될

 

징벌에 대해서는 더없이

마음 아파했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불의한지 너는 알리라.

 

그러므로 그들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징벌을 받으리라.

 

그들은 내 자비를 비웃었으니,

나는 그들을 정의로 다스릴 것이다.

 

나는 그들이 마음대로 부렸던

잔인한 육정의 종과 함께,

 

그리고 이런 이기적

육정을 방편 삼아

 

종노릇 자청하며 섬겨왔던

무자비한 악마의 군주와 함께

그들을 단죄하리라.

 

그들은 함께 어울려

나를 모독했으니 한꺼번에 처벌받고

고통을 당하리라.

 

 

이 말은 그들이 내 대리인들,

즉 내 정의가, 악을 자행한 자들을

징계하고 다스리도록 권한을 위임한

 

마귀들의 손에

고문을 당하리라는 뜻이다.

 

딸아!

이 사악하고 초라한 영혼이 당하는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으뜸가는 악덕은

세 가지다.

 

첫째는 이기심이며,

이는 두 번째 악덕, 망상을 낳는다.

 

그리고 이 망상에서 나오는

남을 속이는 기만 속에서

 

세 번째 악덕인

교만이 나오는 것이므로

 

바로 이것이

반역적 불의와 잔인함을 포함한

 

그 외의 사악하고 더러운 죄들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또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지옥에서 으뜸가는 고통

네 가지가 있으니,

 

이외 다른 모든 고통들은

여기서 나오는 새끼들이다.

 

첫째는 이런 영혼들이

나를 보지 못하는 고통이다.

 

그들에게 이것은

너무나 지독한 아픔이어서,

 

만일 그들이 할 수만 있다면

나를 보지 못하는 대신,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보다

 

불 속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더라도

나를 보는 쪽을 택할 것이다.

 

이 첫 번째 고통은

양심의 벌레를 되살리게 되고,

 

이 양심의 벌레가

그들의 두 번째 고통이 된다.

 

 

그들이 나를 잃어버리고

천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대신

 

마귀들을 쳐다보며 그들과

어울리게 한 것이 자신의 죄였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을 때,

 

양심의 벌레가 줄기차게

그들을 갉아먹기 시작한다.

 

악마를 바라보는 것이

그들의 세 번째 고통으로,

 

이것은 다른 모든 고통들을

몇 배로 늘어나게 한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성인들은,

그토록 흘러넘치는 사랑에서

 

스스로를 희생해 가면서 나를 위해

치른 수고들에 대한 보답으로

 

끝없는 환희 속에

새로운 기쁨으로 타오른다.

 

 

그러나 이 사악하고 초라한

영혼들의 경우는 정반대다.

 

그들의 새로운 활력이란 고작

악마를 보는 고통뿐이니,

 

이것은 그들이 악마를 바라보면서

자기 자신을 더욱 잘 알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기 죄가 악마의 입맛에, 자신을

꼭 맞는 존재로 만들어 놓았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양심의 벌레는 갉기를

계속하고 양심의 불길은

언제까지나 사그라들 줄 모른다.

 

그들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악마의

 

실제 모습 그대로를 보기 때문에

고통은 훨씬 더 깊어진다.

 

 

너는 언젠가

내가 악마의 실제 모습을

한순간도 채 안 될 짧은 순간

보여 주었을 때,

 

네가 의식이 돌아오고 나서

마지막 심판 날까지 불길을 걸을망정

 

다시는 그를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네가 보았던 그런 것들에도

불구하고 그가 얼마나 끔찍한지

실제로 너는 전혀 모른다.

 

왜냐하면 내 신적 정의가

나를 잃어버린 자들에게는

그의 모습이 훨씬 더 끔찍해지도록,

 

끔찍함의 정도를 그들 죄의 크기에

비례하도록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네 번째의 고통은 불길이다.

이 불길은 사그라질 줄 모르고

타오르는데, 그 이유는

 

영혼은 불로 태워 없앨 수

있는 물질적인 것이 아닌

 

영적인 것이라

결코 소진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신적 정의의 불길이

 

이런 영혼들을 세차게

불태우고 고문을 가하되

태워 없애지는 않도록 하고 있다.

 

이처럼 괴롭고 그지없는

불길의 엄청난 고통은

 

그 형태가

그들이 범한 죄의

형태만큼이나 다양하고,

 

혹독한 정도도 그들의 죄에

비례해 다소 다르다.

 

이 네 가지 고통으로,

냉기와 열기와 분을 참지 못한

독한 마음과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들이 파생한다.

 

 

그들이 생전에 저지른 불의와

그릇된 판단을 두고 내가 처음으로

그들을 질책했을 때,

 

그들은 자기네 길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죽을 당시

내가 그들을 두 번째로 질책했을 때

그들은 희망을 갖지 않았고

 

나에게 무례한 짓을 자행했다는

사실을 죄송스러워하지 않고

 

오로지 그들이 처한 곤경만을

안타까워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은

영원한 죽음을 자초했던 것이다.

 

살 때는 자비의 계절이지만

죽으면 정의의 계절이다.

 

 

출처: ‘시에나의 가타리나’

   - 대 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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